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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럼] 부모는 자녀에게 객관적일 수 있는가? 부모도 자녀 못지않게 인정욕구가 있다.

슬하에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있다. 항상 기준은 자신이다. 나의 기준으로 볼 때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점점 심해져서 급기야 나는 아들에게 욕도 하고 소리도 버럭 지르고, 욱하는 감정을 자주 들어냈다. 밤새고 게임하는 아들 그보다도 나를 대하는 아들의 공격적인 태도를 이해하려고 해도 나의 이해부족과 인내심이 약하다는 것을 자주 증명하게 됨으로써 심한 좌절감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된다. 부모의 보호 안에서, 자녀의 양육이 포근하고 따뜻했더라도(부모의 입장에서) 이기적인 자녀는 분명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부모가 인격적으로 자녀를 대하고 충분한 영역에서 의존하도록 펼쳐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녀가 인격이 아닌 그것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했다면 자녀를 존중했던 것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즉 오히려 자녀의 이기심을 더해주는 ‘독’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항상 좋은 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불평불만 투성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상처만을 우겨댄다.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작용보다는 오히려 등을 지게 되는 경우가 벌어진다. 누구의 잘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각자의 입장만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는 ‘사람은 이기적이다’를 자녀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배제해버린 것이 결국 스스로 상처를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본능대로만 살아간다면 사람을 ‘인간’이라는 언어로 “사람 '인(人)'”자를 쓰지 않았겠지? 란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그것이 곧 인간(人間)이지.’ 이런 생각을 아직까지 하고 있는 구시대의 사람인가 순간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지만,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배움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도 본능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무한함을 품고 있는 존재도 ‘사람’이다.누구든 얼마든지 정해진 틀을 뛰어넘을 잠재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애쓰지도 않고, 뛰어넘을 생각도 없다. 정해놓은 틀 속에서 장악하려고 하거나 안주하려고만 한다.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믿어버린다. 차라리 믿어버리는 것이 속 편할 수도 있다. 그렇게 누릴 수 있는 사람이면 그나마 삶이 쉽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나 자신보다 더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 성장을 위해서 깨지고 또 깨지면서 현재보다 더 높은 차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일지도 모르겠다.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실제로 경험했던 내용들로 내적 대상이 구성된다. 그래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다른 가슴의 온도를 지니게 된다. 만약 부모가 흥분시키는 대상으로써 실제 자녀를 감질나게 했던 방식으로 삶을 대했다면? 혹은 부모가 거부하는 대상으로써 실제 자녀를 냉정하게 거절했던 방식대로 공격하고 금지령만을 요구했다면? 부모의 생활양식이나 성격, 행동, 자녀에게 반응해 주는 미묘한 차이에 따라 자녀의 심리적 안정감과 성격은 직접적으로 유형화되고 조직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상적인 부모를 만나서 항상 자녀를 기쁘게 해주고 소중히 대해줬던 방식대로 돌보아주었다면 또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인성을 갖추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던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악용하는 이기심을 발휘하는 자녀도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부모’이고 싶어 한다. 자녀 또한 부모에게 ‘좋은 자녀’이고 싶어 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은 각 개인마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상당히 주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 변형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정해놓은 틀이 결국 ‘자신의 늪’이 되고 만다. 보편적으로 ‘좋은’대상은 유아의 의존성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부모의 특성을 가진다. ‘나쁜’대상은 유아적 의존성을 충분히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부모의 특성을 가진다. 즉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라는 범주 차원에서는 자녀의 의존성을 충족시켜주느냐 않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이것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충분한 돌봄이 제공되었느냐에 관련이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는 안아주는 환경이 되어주고, 자신을 반영해주며, 자신의 전능감을 현실화 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이기를 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녀가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때, 부모가 그것을 받아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다음 단계의 발달을 이를 수 있다.

그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는데 자녀의 잘못된 행동과 언어는 더 이상의 부모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가족, 부부, 더 넓게는 혈연과의 관계는 피는 물보다 찐하다. 끊어 주어야 될 것이라면 마음으로는 아닐지라도 끊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단단해져야 한다. 끊어줘야 할 대상이 부모가 될 수 있고, 자녀가 될 수 있다. 나중에, 아주 나중이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서로를 걱정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서로 자기생각만 '맞다'고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질 때, 무엇이 배려이고, 무엇이 감사함인 줄 알 때, 그 때 다시 인연을 되어도 좋다. 그 시간이 오지 않더라도 괜찮을 만큼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부모와 자녀가 악연처럼 느껴지고,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관계가 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상처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인연의 끈을 필연적으로 잡고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끈을 놓을 필요가 있다. 각자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거리두기는 꼭 필요하다.

- 가득이심리상담센터 심리학박사 박  경  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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