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녀 우울하기도 했다. 명치끝에 매달린 묵직한 그것 때문에 가슴이 답답한 날도 많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런 느낌들이, 가슴 밑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날은 어김없이 불면에 시달렸다.

그리 많지 않은 농사 거리가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우리 집.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어떤 경우이든 우선권이나 특혜는 장남인 오빠에게 주어졌고, 그다음 순위 역시 남동생 몫이었다. 특히 대학 진학 문제는 더욱 그랬다. 내게도 진학의 기회가 주어질까? 혹시나 했던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나는 진학반에서 비진학 반으로 반을 옮겼다. 그렇다고 내게 아예 꿈이 없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집안 형편을 고려해서 사범대나 교대를 염두에 두었고, 또 틈틈이 글도 쓰고 싶었다. 원하는 대학에 가면 그 꿈은 이루어질 거라 여긴 것도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집안에서 딸의 의견이나 꿈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며,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 갔다. 만일 그때, 단식 투쟁이라도 벌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나이에 맞지 않게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는 생각을 성인이 된 후에 해보았다.

나는 그렇게 떠밀리듯 세상에 뛰어들었고, 그 세상 속에서 농촌에 정착하려는 뜻을 가진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말리셨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대학 진학의 좌절에서 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한몫했던 것 같다. 눈물과 시련으로 범벅이 된 농촌에서의 신혼살림, 결혼 2년이 지나 우리는 분가를 했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지만 노력에 비하면 결실은 턱없이 적었다. 설상가상으로, 거절하지 못하고 도장을 찍어준 대출 보증 건이 잘못되었다.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두 번.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지독한 가난을 실감하며, 고민 끝에 남편과 나는 농사일과 직장 일을 병행해 나갔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되기까지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어찌 고난의 날들만 있었을까.

TV보다는 라디오가 더 친근하던 시절, 청취자들이 보내주는 사연을 엮어서 방송되던 라디오 프로가 있었다. 내 아이들과 나눈 몇 마디의 대화와 농촌의 일상들을 생활 수기 형식으로 정리해서 그 라디오 프로에 투고했다. ‘하고 싶은 일’을 묻는 내 질문에, ‘짜장면 배달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대답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던 아들. 월급도 받을 수 있고 짜장면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는 열 살배기 아들의 말이다. 가슴 먹먹하던 그 순간의 느낌과 거기에 더해진 나의 촌스러운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진행자와 유선으로 인터뷰까지 하고 나니 마을의 경사라며, 시골 마을이 며칠간 들썩거렸다. 그때 일은 당연히 행복한 추억이지만, 눈을 감으면 여전히 아프다. 지금 그 아들은 짜장면 배달부가 아닌 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딸아이 역시 제 소망대로 아이들을 지도하며 잘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내 아이들한테 갖는 미안함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남들처럼 해외 나들이는 그만두고, 하다못해 여름 냇가에도 한 번 나가보지 못한 채 커 버렸으니. 어디 그뿐이랴. 아이들 키우며 찍은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 없다. 말끔히 차려입고 사진관에 가 볼 겨를이 없이 살아왔다면 오히려 구차한 변명일까. 나는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면 영 어색하다.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웃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나 보다.

29년간의 직장 생활을 과감히 접고,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그중에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한 가지만 실천해 보기로 마음먹으니 문득, 갈래머리의 한 소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우리 동네 뒤편의 언덕배기에 올라앉아, 죄 없는 클로버 이파리만 쥐어뜯고 있던 한 소녀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그거였구나!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던 그 갈증의 정체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마음을 정했다. 40년 전에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그 길을 이제라도 가보는 거다.

초등학교 때,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밀린 방학 숙제가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일기다. 잔뜩 밀려둔 일기를 한꺼번에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중간중간 ‘동시’를 쓰면 밀린 일기 숙제를 힘들이지 않고 끝낼 것 같았다. 얼렁뚱땅 ‘동시’ 흉내를 내며 시작된 글쓰기는, 자주 쓰다 보니 재미도 붙어 고등학교 때까지 문예반에서 계속했다. 개교기념일 무렵이면 교내 ‘문학의 밤’ 행사가 있었는데, 특별히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우리에게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까마득히 빛나 보이던 서정주 시인께서 해마다 그 행사에 참석하신 일이다. 아마도 학교 측과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문예반 교실에 오셔서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고, 일 일이 학생들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 내가 품었던 작은 별 하나가,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천천히, 배우면서, 두 가지 모두를 갖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어쩌면 살아온 날들보다 더 큰 노력이 따라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잘 안다. 고맙게도, 미안함만 먹고 자란 내 아이들은 이제 든든한 응원군이 되었고, 나의 뒤늦은 행보를 남편도 이해해준다.

올해 봄, 그 설레는 여정의 출발선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났다. 문화원 시 창작반에서 만난 선생님과 나이를 잊으신 학생들, 또 독서동아리 회원들.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의 일상을 푸르게 가꿔나가는 아름다운 분들이다. 낯가림이 심한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신 그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깊은 밤,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름을 알 듯 모를 듯한 꽃향기가 바람결에 묻어왔다.

이제, 나를 그토록 따라다니던 그 정체불명의 그림자와도 헤어질 시간이 온 것 같다. 행복한 이별이다.

시시낙낙 회원 최 은 수 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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