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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 -

윤봉길(尹奉吉)의사 출생은 1908. 6. 21. 사망은 1932. 12. 19. 으로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1908년 충청남도 예산 아버지 윤황,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며 자퇴하였다

.이후 1921년(14세) 마을 인근의 유학자 매곡(梅谷) 성주록 선생이 개설한 서당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과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공부하였다. 1926년 오치서숙을 마칠 때즈음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매헌(梅軒)이라는 호를 얻었다. 오치서숙을 마친 1929년부터는 농촌 발전을 위한 '부흥원'과 농촌 자활을 위한 '월진회' 등을 조직하여 농촌계몽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하에서 농민운동의 어려움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하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이라는 신념이 담긴 편지를 남기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향하던 중 선천(宣川)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일본 동경에서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이후 윤봉길은 일제가 고의로 일으킨 상하이사변을 계기로 도발한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식 겸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거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기념식 행사에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숨겨 들어간 뒤 기념식 도중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이로 인해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 2명이 즉사하고, 군 수뇌부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사건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윤 의사의 시신은 1945년 5월 한국으로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안녕히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중에서 -

 

 

​요약,"윤봉길 의사"는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경축식에서 일본의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이 거사로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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