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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럼] 어설픈 기득권자의 갑질은 오만의 행위다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박 경 은 철학박사(심리학전공)

갑질은 상대방에게 억울함과 분노를 사게 하는 행위임으로 갑질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복을 발로 차는 격이다. 특히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행위라면 더더욱 삼가야 하는 행동 중의 하나다. 대한민국의 어설픈 기득권자들의 갑질은 극도의 불쾌감을 준다. 그것을 ‘같잖다’라고 말한다. ‘어설픈 기득권자’라 함은, 각 기관마다 신입사원을 제외한 팀장, 실장, 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갑질이다. 신입사원일 때 당했던 느낌대로 심리적 괴롭힘을 그대로 전수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생겨났고 각 직장마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교육’을 진행한다. 이것은 직장 내에서 경각심을 심어줌으로써 많은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병원을 예로 들면, 병원장님의 진료가 누가 봐도 오진(誤診)인데, 그들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명할 수 없는 그런 세상에 답답해하면서도 의심을 끈을 놓치 않는다. 울분을 토할 만큼 억울해도 하소연할 때가 없다. 병원측은 ‘해볼테면 해봐라’는 오만한 태도 때문에 더더욱 분노가 줄어들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또한 권력에 대한 갑질인 것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를 보고 또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들처럼 환자에게 진심을 다하고 오진할 경우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의사를 우리 모두는 원하는 것은 아닐까한다.

또 다른 예로, 외부강사의 하소연을 풀어보려한다. 각 기관에서 외부강사를 섭외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했던 강사그룹을 섭외하거나 소개를 받는 형태로 대부분 이루어진다. 워낙 강사가 많이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강사를 검증해야 하는 기관의 입장에서는 모험을 하진 않을 수 있다. 외부강사를 섭외하는 담당을 맡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은근히 갑질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강사를 섭외할 때 기본으로 강사료 부분과 지급날짜 등을 먼저 제시하면서 서로의 의견이 맞으면 강의 계획서를 제출하거나 그다음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도 없이 기관에서 필요한 것만 요청하고 강사가 강의를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강사료 지급이 늦어지거나 전혀 연락이 없는 기관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강사료 지급 건에 대해 거꾸로 물어봐야 하는 불편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기관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 채 책임을 행정직원에서 떠맡기는 사람도 있다. 섭외된 강사가 강사료를 물어보기 이전에 기관에서 기본으로 지켜줘야 하는 규약을 무시해버린다면 그다음은 강사의 몫일까? 이렇게 어설픈 기득권자들의 갑질은 너무나도 만연하다. 안타깝고 분노하고 같잖지만 사회는 그런 비합리적인 태도들이 평준화되어 있는 것처럼 묵인해버린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더 활성화되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으로 비유하자면 ‘신문고’ 역할과 같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과 어설픈 기득권자들의 갑질은 자신을 위해서 멈춰야 한다. 다시 타인을 힘들게 한 만큼 되돌아 받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꼭 자신이 되돌려 받아야 받는 것인가? 자식이 또는 대대로 받게 된다면 지금 현재 어떤 마음가짐과 행동가짐이 필요할 것인지는 각자의 숙제로 남겨둔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나로써 어떤 삶을 추구하고 싶은가? 를 끊임없이 물어본다. 그런 과정 중 사회적인 부조리를 많이 느낄 때 나는 울분한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길게는 2~3일 지나면 수용해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결국 자신의 ‘부족함’으로, ‘능력 없음’으로, 사회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력함’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또는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 그리고 양심의 기준에 대해 망연자실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나에게 되묻는다. 사회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나는 ‘갑과 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나만이 ‘정의’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인가? 결국 나조차도 그것을 ‘정의’라고 할 수 없음에 손을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 자신이 아플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간다. 때때로 아무 생각없이 ‘삶의 흐름’으로 생각하는 편이 내가 살아가기엔 편하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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