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자수첩
거이기 양이체(居移氣 養移體)- 거처거, 옮길이, 기운기, 봉양할양, 옮길이, 몸체 -

"사람은 그가 처해있는 위치에 따라 기상이 달라지고, 먹고 입는 것에 의해 몸이 달라진다."는" 뜻 

맹자가 범(范 - 고을)에서 제나라 서울로 갔을 때, 멀리서 제나라 왕자를 보고 위연이 탄식해 말했다.

"거처는 기상을 변하게 하고, 먹고 입는 것은 몸을 달라지게 한다. 사람에게는 거처라는 것이 참으로 관계가 크다. 다 같은 사람의 자식이 아니냐"

맹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왕자가 살고 있는 집이나, 그가 타고 다니는 수레며 말이 대체로 다른 귀한 집 자식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왕자가 저같이 달리 보이는 것은 그가 처해 있는 위치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천하의 넓은 곳이란, 도를 터득해서 천지와 호흡을 같이 하는 성자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맹자는 또 이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했다.

" 노나라 임금이 송나라로 갔을 때 질택이란 성문에서 크게 외쳐 불렀다. 그러나 문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이상하다. 분명 우리 임금님은 아닌데 어떻게 목소리가 꼭 우리 임금님과 같을까?'라고 했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두 임금의 처해있는 위치가 서로 같았기 때문이다."

맹 자 (孟子/BC 372?~BC 289?)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추(趨) 출생.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충청베스트뉴스  webmaster@ccbnews.kr

<저작권자 © 충청베스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충청베스트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